*어머니의 바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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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인천 만석동 괭이부리 부둣가에서 모진 고난을 이겨내며 지친삶에 매달리셨다.
허리에 복대 옷을입고 배에 무거움을 차고 걸으면 펭긴걸음 걸으면서 살아 오셨다. 힘들어한 어머니모습이 아련하게 그려진다.
그 덕에 밥은 굶지않을수 있었고 큰아들(신×균)대학까지 보내셨다. 내가 공부를 한다고 해도 보낼 형편이 안됐다.
어머니는 여러번 말했다 공부를 더해야 하는데 하시며 미안 하다 하시며 아버지가 살아 있었으면 이런 걱정은 안해도 됐을텐데 하시며 안타까워 하셨다.
어머니는 큰아들에게 공부 해서 성공하면 집안도
동생도 네가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어머니는 작은아들(신택균)나를 무척 가여워 하셨다. 너는 형이 잘되면 너도 걱정 없겠지만 두형제 우애있게 지내야 한다고 당부 하셨다.
그래서 그랬나보다 만석동 사셨던 어머니 친구분들을 만나면 한결같이 하는말이 나한테는 듣기 민망하면서 듣기 싫은 말을 했다.
"차는 형이 사줬어" ?
"아파트 형이 사줬어" ?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짜증이 났다.
그런데 말속에는 무엇인지 숨겨진 숨은뜻이 이었다.
만석동에서 어머니의 바램을 알기에 걱정스럽게 하는말들 이었다.
"장가가면 그렇다니까."
"여편네가 잘 들어와야 형제지간도
좋아지는거야"
하는말의 뜻을 알겠다. 어머니의 바램은 이런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기에 하는말이다.
*우리 형제는 악연인가*
우리 형제는 같은 부모에서 태어 낳다고
하지만 닮은 구석이없다. 우린 생김새와 성격 등
모든 면에서 닮거나 비슷한 구석은 없다.
아버지는 내가 3살 때 하늘나라로 가신 후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것을 보아 생존에는 볼 수 없는 아버지가 되셨다. 어머니와 형 그렇게 살면서 형을 중심으로
우리집 생활이 된 것 같다.
어머니가 가장이면서도 남편이 없으니 아들에게
의존 하게 된 것 같다.
그렇게 사는 것이 삶이라고 형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며 살았다. 우리집은 모든 것이 우선은 형이었다.
당연히 그런 것 인줄 알았다.
*17살 되던 해*
나에게 변화의 물결이 불어왔다. 주변에 많은 친구들과 만남 그리고 남진 나훈아 펄씨스터의 물결 속에
음악과 노래의 흥을 알게 되었다.
형의 군대생활 3년 사이에 자유로운 생활에 적응 하게 되었다. 20살 되면서 형의 제대가 보이지 않는 억압으로 느껴진 것 같다.
어머니 앞에서 난생처음 형과 싸우게 됐다. 내가 잘못 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런데 형이 폭력으로
나왔다 동생을 다둑 이며 타일렀으면 싸움까지 안
갔을 것 이라고 몇번이고 생각 했다.
어머니는 생존에 여러 차례 말씀 하셨다.
너희들이 결혼해도 난 작은아들과 살 것이라고
하셨다. 형이 가부장 적이며 까칠한 형의 성격이 항상 걸리셨던 것 같다.
항상 웃는 작은아들이 좋다고 하셨다. 그 때는 정말 많이 웃으며 살았다. 너무 웃는다고 허파에 바람 들어 갔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영등포 에서 신내과 하시던 신창식 의사도 내가 너무 웃는다고 할만큼 웃음이 많았다.
그렇게 잘 웃던 웃음보따리가 사라져 버렸다. 왜 사라져 버렸을까.
세상은 어제와 변함없이 똑같이 돌아가는데 어머니가돌아가신후 세상에 외톨이가 되었다는 강박관념(强迫觀念)인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웃음을 잃어 버렸다.
형이 결혼을 하자 내 주변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느끼며 가슴 아팠다.
잠실로 가더니 분당으로 갔다. 인천에서 분당은 끝에서 끝으로 옮겨 갔다. 그때부터 내 주변에서 멀어지는 것을 보고 이웃사촌만 못 하다고 생각했다.
이웃사촌이 훨씬 좋다고 느꼈다.
사우디에 취업해 1년6개월 만에 집에 돌아 왔을 때 아내는 젖먹이 두 딸 키우며 살고 있는데 어떻게 살고 있나 한번씩 찾아봤으면 고마웠을텐데 생각 할수록
정말 가슴이 아팠다.
세상 천지에 하나밖에 없는 형인데 그렇다는 것은 형제지간은 멀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래된 일이다. 아현동 사촌형(유균,가균,)북아현동 집에서 사촌형(신☆균)이 판교형(신×균)에게 동생도 신경을 쓰라는 말에 불끈하며 "내 동생 내가 잘 챙긴다" 고 반박하던 형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가끔 생각을 해 보지만 형에게 동생이란 어떤 존재 인지 궁금하다. 원수나 골치 아픈 존재 인가보다.
끊었으면 하면서도 끊지 못하는 존재였던 것 같다.
그래서 가슴 아프다.
2017년 여름 올레길10-1코스 가파도를 가기위해
형과 함께 모슬포항에 갔다.
마침 모슬포항 에는 금방 잡아오는 자리돔이 펄쩍 뛰고 있었다. 이맘 때가 되면 모슬포항과 보목항에서
자리돔 축제가 열린다.
마침 가파도 배 출항시간도 많이 남아서 자리돔 회를 먹고 가기로 하고 회집에 자리를 잡았다.
형은 막걸이와 물회만 주문했다. 그런데 나는 물회하고 무침회를 추가로 주문했다. 솔직하게 양념에 버무린 무침회가 먹고 싶었다. 그러나 형은 막무가네로 물회만 고집 했다.
동생이 먹고 싶다고 하며 주문을 하였다. 형은 돈을 나보고 내라면서 목소리가 커지면서 식탁에 막걸이병을 쾅쾅 치며 화를 낸다.
그리고 형이 한말이 나로서는 이해가 안됐다.
매운 것을 못 먹어서 주문하지 말라고 했단다.
그렇게 한바탕 하고나서 가파도에 들어갔지만 우리는 말 한마디 없이 올레 코스를 돌고나서 모슬포에 나오자 혼자 가겠다며 올레 다음코스로 간다며 가버렸다. 나 역시 찹찹했지만 형이 한말이 계속 귓전을 맴돌고 있다. “동생과 나는 악연” 이라고 한 말이 가슴에 박혔다. 그렇다 악연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양보를 못하고 형 대접을 안 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올레길을 혼자 걸은 후에 저녁시간에 전화가 왔다. 종달리 숙박업소에 있다고 올려면 오라고 한다. 두말않고 섭지코지 숙소에서 자전거를 타고 단숨에 달려가 형하고 잠을 잤다.
다음날 숙소에 와서 짐을 챙겨 제주공항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제주를 떠나 버렸다.
그럴 때 마다 이번일은 없었던 일로 아무에게도 발설 말라는 함구령이 내려졌다.
이번일이 알려지면 교수의 신분에서 난감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형수가 알게 될까봐 그런지 모르겠다. 내 생각으로는 이해가 잘 안 되는 구석이다.
인간은 모두가 똑같다. 좋으면 웃고 화나면 화내고 체면 때문에 참고 숨기고 하는 것이 아쉅다.
형은 대학교수 박사라는 칭호에 존경 받는 학자이며 명예도 얻었고 물질적인 재물까지 이룬 성공이라면 성공을 한사람 이라고 봐도 손색이 없다.
외사촌형(조×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집안에 6명의 박사가 나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며
흥분하여 말하였다.
대단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어머니 뜻과같이
집안도 돌봤다며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우리 자식(수진. 수연.)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우리보다 잘사는 큰집 이며 지금은 잘 풀리는집 이고 외가집하고만 잘어울리는 집 이라고 한다.
아빠 (신택균)에게만 잘 하는집 이라고한다.
결혼해서 30년은 형이라는 사람이 차라리 없었으면 하면서 살았다.
아내가 형네 집에 가는 것을 싫어했다. 물론 형네도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알았다.
1년에 명절 때와 그리고 제사 때 그렇게 따져봐야 4번 이었지만 그 때가 닥아 오면 죽을만큼 정말 힘들었고 괴로운 세월이었다.
이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것같다. 내가 부족해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내가 감수해야 했기에 힘든 세월이었다. 젊은 아내는 오죽하면 형네가 우리같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을까 한다.
혼자 이겨내기 힘들 때는 어머니를 떠 올리며 살았다.
우리 형제는 1년에 서너번 만나는 것으로 만족했다.
언제 부터인지 형제지만 만나는 것이 불편해지기 시작 하면서 만나면 불편 한 것이 많아지기 시작 했다.
친구들 중에 형제들이 등을 돌리고 원수같이 사는 것을 차츰 이해를 하게 되였다.
형제란 끊었으면 하면서도 끊지 못하는 존재였던 것 같다.
우리도 형과의 인연이 좋았던 것만은 아니다. 인간은 상대성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그 사람 역시 나를 좋아한다.
지금까지 형네와 왕래를 한 것은 어머니를 떠 올렸기 때문인 것 같다.
하늘에서 어머니만큼은 형제가 갈라서지 않기를 바랄 것이라고 수십 번 수백 번 생각을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나는 힘들고 어려울 때는 어머니를 떠 올렸다.
아버지 어머니 묘지 파묘 일도 나는 불만스럽다.
처음이야기가 나왔을때는 납골당에 안치 하자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년 후에 파묘 이야기가 나왔다.
(요지) 충주 잣나무 5그루 밑에 수목장을 하고
우리 형제도 죽으면 잣나무 밑에 묻히자는 말
감언이설 에 잘못 판단을 했다.
충주땅은 맹지여서 길도없고 교통편도 불편하다.
후회가 막심한 파묘였다.
후손을 위해서 미리미리 하는일 이라고 하지만
현실이 불편한 것은 고려하지 않았다.
2022년 추석에 결국 결단을 내리는 계기가 됐다.
코로나 막바지에 차례 안와도 좋다며 인심이나
쓰듯이 말하는데 어이가 없었다.
오죽했으면 "형이 좋아서 온것도아니고"
"형수가 좋아서 온것도 아닙니다"
"어머니 아버지 차례 지내러 오는겁니다" 라고
말했을까 그런데 형이 하는 말에 할말을 잃었다.
"동생 꼴리는대로 해 " 올테면 오고 말테면 말고
꼴리는대로 하라고 한다.
그 날 이후로 어머니 아버지는 내가슴속에
묻기로 했다. 신경쓰고 스트레스를 받으니
편두통이 힘들게 한다. 의사 말대로 스트레스를
멀리하면 편두통 역시 멀리 사라져 버릴것 이란다.
내가 형이라면 명절 때라도 가족이 모두 모여
얼굴이라도 보도록 하자고 할 것같은데 서로가
성향이 다른 것 같다.
우리 형제는 악연이라고 하더니 맞는 것 같다.
어머니는 남자라해도 감당하기 힘든 노동을
하면서라도 형에게 공부를 시킨 것은 장남이기에
선택을 받은것 이다. 선택을 받았으면 집안과 동생을 돌보라는 어머니의 뜻이 있었을것이다.
어머니의 바램을 저버린 것이 아쉬울 뿐이다.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바래서 하는것이 아니다.
바랜다고 내어줄 형이 아니라는 것은 말 안해도
알고있다.
그러나 누군가는(이×수) 이런말을 했다.
형이 한두번 도움을 주었는데 안되는것을 어떻게
하냐고 할바엔 차라리 도움을 안주는 것이 낮다고
한다. 도움을 줄려면 끝까지 잘될때가지 도움을
준것이라야 도움을 준것인라 한다.
그러면서 당신 형이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어머니
뜻을 따라야 하고 형제 의리를 지켜야 하는 것이
형의 책임을 다하는 것 이라고 말한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앞을 가린다. 어머니도 여자다.
30대 한창 사랑에 빠져 남편의 품속에서 꿈꾸고
있을 시기에 어머니는 칼바람 불어대는 부둣가에서
먹고 살기위해 기침소리 콜록대며 견디신 어머니
생각에 가슴이 메어진다.
어머니 아버지 묘소를 가지고 말도 많터니 결국은 교묘하게 파묘를 하면서 충주로 빼돌리는 일이 버러졌다. 후손을 위해 정리한 것이 두메산골 맹지로 옮긴 것이란 말인가 괴심하기 짝이 없다.
할말이 없고 계획적인 속임수 였다. 이미 지난일이 돼 버렸다. 생각대로 됐으니 잘 됐다. 이제부터는 어머니 기일에 아버지 기일에 삼색과일에 술한잔 올리면 된다.
엊그제 이웃 배씨 형과 가현산 산책을 하며 바람의 언덕에 도착했는데 산정상에서 가족납골당 공사를 하고 있었다. 불연듯 생각이 났다. 명예와 재물이 가득하면 뭐하냐 남들 다 만드는 가족납골당 도 못만들고 길도없는 맹지 땅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신다니 답답 할뿐 이다.
내가 못하면서 바라는 꼴밖에 안돼 말을 안하는거다.
남들도 기제사 차례에도 참석 할 것도 없단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것 같다. 때에 술한잔에 삼색과일 놓고 재배나 올리면 될 것같다. 이제부터는 서로의 갈길을 가면 된다. 모든 것을 팔자라고 하자. 팔자대로 살자.
결국 "어머니의 바램"은 물거품 으로 끝나고 말았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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